묘당도 월송대에 풀이 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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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당도 월송대에 풀이 나지 않는 이유
  • 박남수 기자
  • 승인 2022.07.29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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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 이충무공유적지 충무사 월송대

그곳엘 가면 맨 먼저 하마비와 만난다.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누구라도 말에서 내려라"는 뜻일 거다(大小人員皆下馬碑). 그곳에 무엇이 있길래 그럴까?

먼저 왼쪽 바닷가 월송대라 불리는 작은 소나무 언덕을 오른다. 이 곳은 정유재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뒤(1598년 11월 19일) 충남 아산으로 이장하기 전 80여일 동안 매장되었던 가묘다. 소나무 숲 사이로 약간 봉긋한 가묘 가운데 부분은 여전히 풀이 자라지 않는다.

전에 찾았을 때는 가묘를 둘러싼 울타리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철제 울타리들이 모두 잘리고 시멘트 기초덩어리만 이리 저리 뒹굴고 있었다. 정비를 하려는지 그건 알 수 없다. 이곳이 월송대(月松臺)라 불리는 이유는, 충무공이 1598년 2월 고금도로 수군 본영을 옮긴 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서 자주 깊은 시름에 잠겼는데 달이 몇 시간을 움직이지 않고 소나무 사이로 공을 비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격년으로 11월 즈음에 고금도 청년회가 월송축제를 개최하여 충무공의 정신을 이어왔다. 그러나 지금도 그럴까?

월송대를 내려와서 반대편으로 오르면 충무사다. 1953년 세워진 사적 114호 국가 문화재다. 그런데 본당 내부에 당연히 있어야할 영정사진이 보이질 않는다. 바깥 기둥에 영정 교체작업 때문이라는 안내문이 붙었기는 하나 영정이 없는 사당이라니 기가 턱 막히다. 전에 왔을 때 자물쇠로 잠겼던 것을 생각하며 오늘은 위안 삼는다.

사당을 다시 내려와서 바닷가 쪽에서 다시 약간 오르면 우물터가 나온다. 그런데 그 우물은 풀이 우거져 길조차 찾을 수 없다. 국란의 시기에 해군사령부 장병들이 마셨을 우물터를 저리도 방치해도 되는 것일까? 한심한 일이다.

하마비를 지나 차로 오분 거리에 있는 활터를 찾았다. 사정터(射亭-)다. 충무공이 정유재란 당시 이곳에서 활을 쏘았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멀리 수령이 400년 되었다는 은행나무 서 있다. 그 세월이면 충무공 서거와 맞아 떨어진다. 입구 간판에는 목포대 박물관에서 2008년 6월부터 한달간 발굴조사 작업을 했다고만 쓰여있다.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 그 활터에서 내려다 보니 월송대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활터를 내려와 역시 5분 거리에 있는 화성리 마을 도로변에 어란정(於蘭井)이 있다. 정유재란 당시 화성리 앞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훈련을 했던 수군이 이 우물을 이용했다고 전한다. 아래 사진에서 위는 지난 2004년 어란정이고 아래는 며칠 전의 것이다. 비록 시멘트라도 지붕이 있어서 지나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눈비도 피하지 못해 우물은 형편 없고 어란정 안내판은 풀속에서 뒹굴고 있었다. 누굴 탓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고금도에서 신지도를 가려면 고금도 상정리로 가야한다. 상정항에서 바닷가 쪽으로 일킬로미터 쯤 들어가면 최근에 만든 약수터가 있다. 상정리 버섯구미약수터다. 안내 간판에 "정유재란 당시에 싸움터에서 부상입은 수군병사의 상처를 샘물로 깨끗이 씻고서 약을 발라주니 씻은듯이 나았으며, 또 배탈이 난 병사에게 샘물을 마시게 하였더니 깨끗이 나았다"고 쓰여있다. 없는 전설과 신화도 만들어내는 요즘에 비추어보면 늦게나마 참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한 젊은 새댁이 갓난 아이에게 샘물을 먹이는 모습이 좋다. 다만, 수질검사 결과란이 공란으로 비어 있는 것이 옥의 티다.

충무공 유적지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도남리 입구 삼거리에 새로 생긴 공원을 들렀다. 듣기에 3억의 예산이 들었다 한다. 장마철인 탓도 있겠으나 여기 저기 잡초 무성하다. 공원 입구 간이용 화장실 한개는 문짝이 떨어져 뒹굴고, 다른 하나는 옆에 드러누웠다. 이 또한 누구에게 책임을 지워야 할까?

충무공이 서거한지 411년이 지났다. 그 후 아직까지 월송대 가묘터에 풀이 자라지 않는 현상을 두고 여러 얘기들을 한다. 죽어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공의 마음이라고. 나라를 구하고 불행하게 죽음을 맞은 영웅의 정신을 계승하기는 커녕, 유물(유적)조차 관리 못하는 못난 후예들을 한심하게 지켜보는 공의 마음이라면 어떨까?

왜적을 향해 두눈 부릅뜨고 한발 한발 쏘았을 사정터(활터)를 복원하여, 그 마음 그대로 지역의 청년들이 심신을 수련하고 국가와 청년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야 옳다. 이를 위해 역사연구회를 만들어 충무공을 공부하고,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정성껏 안내하고 해설해야 옳다. 그들이 고금도의 역사를 공부하면 당연히 추사 김정희를 만나고 다산 정약용을 만나게 된다(추사는 고금도에 유배된 부친을 만나러 몇번 다녀갔다).

이름없는 수많은 장병들이 없었다면 충무공 혼자 왜란을 막을 수 없었다. 그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한 이름없는 장병들의 배고픔을 달래고 목을 적시었을 어란정을 복원하고 정성들여 관리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라서 지붕도 없는 저꼴로 방치하는가? 다 역사의식의 부재에서 나온 비극적 결과다.

해마다 개최하던 월송축제를 최근에 유자축제로 바꾸었다 한다. 넋이 빠지고 혼이 나간 짓거리다. 충무정신을 계승하는 것보다 유자가 팔아먹기에 훨씬 쉬웠을 거다. 유자에 많은 비타민 성분이 몸을 건강하게 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고금도 청년으로 나고 자라 월송대를 잊고 어찌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겠는가? 충무공의 유업을 지키고 계승하며 오늘에 되살리려는 노력이야말로 역사와 사회의 비타민이다. 충무공을 기억에서 싹 지우고, 유자나 광어를 팔아 외제차 굴리며 더 큰 벼슬 노리는 청년들이 올리는 제사 앞에 공이 어찌 편히 눈을 감겠는가?

새로운 주소제도가 시행되면서 소재지에서 충무사에 이르는 길 이름이 "고금동로"다. 충무로라 불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서울에도, 부산에도 있는 이름이라서 그럴까? 허접한 공원 짓는데 3억 예산을 쓰고서도 충무공의 활터나 어란정을 복원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이런 한심한 작태들이 자신의 역사를 잊은데서 비롯되었다 한다면 나만의 억측일까? 이럴진대 오는 11월 어찌 공의 제사를 모실까? 진정 부끄러운 일이다.(2009년 8월 4일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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