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 이미 글로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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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이미 글로벌 있다
  • 굿모닝완도
  • 승인 2023.05.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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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윤(시인, 섬연구소 소장)
(글 사진 출처: 강제윤 페이스북 계정)
(글 사진 출처: 강제윤 페이스북 계정)

 

장산도에서 하의도로 건너왔다.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난 섬. 장산도처럼 하의도 또한 피어린 항쟁의 섬이다. 선조의 딸 정명공주 가문에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물경 333년이나 투쟁을 이어온 섬. 대체 우리 역사에서 아니 세계사를 보더라도 300년 넘게 항쟁을 해서 마침내 땅을 되찾은 사례가 있을까? 외세를 등에 업지 않고 자력으로 승리한 사례가.

하의도는 한국사 만이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빛나는 불멸의 섬이다. 이런 불멸의 섬을 한국의 역사 안에만 가두어서야 되겠는가? 세계에 알려야 할 진정한 글로벌 섬이다. 우리 섬의 위대한 역사 안에 이미 글로벌이 있는데 그 가치는 알아보지 못하고 외국 섬을 찾아다니는 것을 한국 섬의 글로벌화로 착각하는 행정은 한심한 일이다. 신안 퍼플 섬의 사례처럼 글로컬이야말로 진정한 글로벌이다.

하의도 또한 섬이지만 어업보다는 농사가 많다. 과거 육지 사람들이 섬으로 들어온 것은 어업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농사지을 땅을 갖기 위해서였다. 육지에서는 자신의 땅 한 뙈기 없이 소작인으로 살면서 지주와 관리들에게 수탈과 억압을 받았다. 그러니 섬으로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고 간척을 하면서 온갖 고생을 다해 마련한 땅에 대한 애착은 육지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다. 땅은 곧 생명이었다.

섬사람들이 자기 땅을 되찾거나 지키기 위해 목숨 걸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땅을 잃는 것은 생명을 잃는 일이었다. 하의도 사람들이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무려 330년 동안이나 투쟁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 또한 목숨만큼 소중한 땅에 대한 애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의도 대리의 하의3도 농민항쟁기념관은 하의도와 인근 섬 주민들의 333년에 걸친 농민 항쟁의 역사를 기록한 기록관이다. 하의 3도란 하의도와 지금은 다리로 연결된 신의도를 이야기 한다. 신의도는 본래 상태도 하태도 두 개의 섬이었는데 간척으로 하나가 되어 1983년 새로운 하의도, 곧 신의도가 됐다. 과거에는 하의도와 상,하태도 3개의 섬을 하의 3도라 통칭했다.

고려 말 공도 정책으로 비워져있던 이 섬들의 농토는 임진왜란 이후 다시 들어와 정착한 사람들에 의해 개간되고 간척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전쟁으로 재정이 고갈된 왕실은 세수 확대를 위해 섬 지역의 입도와 개간을 권장했다. 조정은 새로 개간한 땅은 경작권을 개간한 자에게 주기로 약속하고 섬 정착을 독려했다. 하의 3도에도 그렇게 사람들이 들어와 황무지를 다시 개간하고 갯벌을 간척해 옥토를 만들었다.

그런데 1623년, 인조는 간척한 주민들에게 땅의 소유권을 주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하의3도의 개간된 땅 24결(약 14만평)을 그의 고모였던 정명공주(1603 ~ 1685)가 시집갈 때 혼수품으로 내주고 말았다. 물론 조건을 달아 정명공주의 4대 손까지 세미(稅米)를 받도록 했다. 억울해도 섬 주민들은 참았다. 하지만 정명공주가 시집을 간 홍씨 집안에서는 4대가 지나도 여전히 세미를 수탈해 갔다.

1729년 주민들에 반환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명 공주의 5대손 홍상한은 주민들이 새로 개간한 땅 140결(약 84만평)에 대해서까지 권리를 주장해 세미를 거두어갔다. 주민들은 농토를 되찾기 위해 싸웠지만 세도가인 홍씨 집안을 이길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대가 지나자 홍씨 집안뿐만 아니라 관에서도 권리를 주장하며 세금 징수해 갔다. 한번 내는 것도 억울한데 주민들은 양쪽으로 세금을 뜯기니 살아갈 수가 없었다. 일토양세(一土兩稅). 그래서 하의도에는 양세 바위라는 이름의 바위 까지 생겼다. 억울함이 얼마나 컸을까. 섬 주민들은 저항했으나 국가와 세도가 집안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싸웠다.

하의3도의 땅은 홍씨 가문에서 내장원으로, 내장원에서 다시 홍씨 집안으로, 다시 조병택·백인기-정병조-우콘 곤자에몬-가미나미 신조-도쿠다 야시치-신한공사 등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때마다 주민들은 진정과 도세 납부 거부, 각종 소송, 농민조합운동 등으로 저항했다. 그러다 해방 후인 1950년 2월 13일, 제헌국회의 무상환원 결의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1956년 하의 3도의 땅은 불하형식으로 하의3도 주민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1994년 누락된 땅들의 등기처리가 이루어지고서야 하의3도 농민들의 농토 찾기 투쟁이 완전히 끝났다. 무려 333년 만의 승리였다. 어찌 세계사에 빛나는 불멸의 승리가 아니겠는가? 동학농민운동이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를 추진 중이다. 세계사를 통해서도 전무후무한 하의3도 농민운동 또한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돼야 한다. 그리하여 하의3도 농민운동사가 세계 농민 운동사의 중요한 역사로 자리매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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