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모를 쓴 학교 행정실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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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모를 쓴 학교 행정실장님
  • 홍솔
  • 승인 2020.07.16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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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를 벗어던지고 교육활동 지원하는 섬마을 행정실장 이야기

 

일선 학교의 개축 및 증축 공사가 마무리되어갈 즈음이면, 기대와 설렘 반절, 이사에 대한 스트레스 반절로 온 교내가 들썩인다. 우리 학교 역시 크게 다를 바 없이 마지막 준공까지 모두가 분주하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한 사내가 있는데, 그는 안전모를 쓰고 자전거와 트럭을 번갈아 타며 학교 안을 종횡무진 누비곤 한다. 종종 그의 손에는 긴 삽자루와 노끈, 철망 따위의 공업용 물건들이 들려 있고, 그가 다녀간 곳은 어김없이 무엇인가 손질되어 있다. 학생들도, 학부모도, 교사들도, 심지어는 학교 앞 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주무관도 그의 정체를 듣곤 “왜?”라고 질문한다. 그가 우리 학교 행정실장이기 때문에.

행정실장님(이하 실장님)은 처음 이 학교에 부임해온 직후부터 마치 홍길동처럼 모든 곳에 왕림했다. 일반적으로 교사(校舍) 및 관사 보수는 시설 관리를 도맡아주시는 주무관님께서 살펴주시는데, 부임 첫날부터 그는 정장에 목장갑을 낀 채 직접 갖가지 공구를 들고 우리를 찾아왔다. 행정실 선생님들 뿐 아니라 교사들도, 학생들도 처음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나사와 못, 드라이버 등을 챙겨 든 채 땀을 흘리는 실장님을 뒤로하고 내 일을 하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도무지 이 감사하면서도 부담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모두가 당황스러웠다. 연초, 관사 싱크대가 터져 물난리가 난 적이 있었는데, 실장님은 말도 없이 그 물까지 걸레로 닦아내고 도망치듯 사라지셨다. 나와 룸메이트 선생님 둘 다 그 뒤로 실장님을 뵙기가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부임지에 오셨으니 열정도 넘치실 것이고, 연초에만 저러시다가 이내 행정실 큰 의자에 앉으시겠지, 싶었다. 이것은 내가 실장님에 대해 가진 가장 큰 착오였다.

실장님의 기이한 행적은 오히려 점점 극대화되었다. 입고 있던 권위의 정장은 벗어 던진 채, 공사장 한복판에 서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차림으로 안전모를 쓴 채 나타난 것이다. 어느 날은 삽을, 또 어느 날은 쓰레기봉투를 주렁주렁 달고 정문에서 뒷산, 중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혹자는 ‘권위 없이 친근한 실장님’의 ‘이미지 메이킹’이 아니냐 물을 수 있지만, 실장님의 안전모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누구보다 시설 관리에 진심을 담은 분임을 알 것이다. 대관절 어떤 행정실장님이 6개월 넘도록 학교의 모든 쓰레기를 관리하고 작은 비품 하나까지 스스로 챙기며 운동장에 잔디를 심는단 말인가. 나는 실장님을 뵐 때마다 ‘첫 발령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 모습이십니까?’라고 묻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곤 한다. 어른들은 실장님을 보며 현장 소장님 아니시냐며 반문하고, 아이들은 우리 행정실장님이 도라에몽 같다며 까르르 웃는다. 아무튼, 평범한 분은 아니심이 틀림없다.

실장님의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헤진 남방에 작업용 바지를 얼추 입고, 손에는 여전히 빨간 페인트가 덧대어진 목장갑이 씌워져 있다. 아무렇게나 정돈된 머리카락은 시원한 바닷바람에 기분 좋게 휘날린다. 업무를 처리하고, 학교를 돌아본 후, 다시 업무를 처리하고 또 다시 모든 곳에 등장한다. 그러다가 기분이 좋은 날에는 동네 중국집에 들러 어린 주무관들과 교사들에게 짜장면을 한 그릇씩 대접한다. “나랑 밥 먹어줘서 고맙네이~ 혼자 먹을 뻔했는디.” 우리가 전해야 할 감사 인사도 잊지 않고 본인이 먼저 전한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정을 전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며, 자기 일을 즐거워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행하기도 어렵거니와, 장기간 이어가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 사람의 본질이 ‘원래 그러한 것’으로 인식되려면, 긴 시간 동안 같은 언행을 유지해야만 한다. 아직 짧은 교직 생활과 30년이 채 덜 된 어린 삶을 살아왔지만, 내가 보아온 사람 중 내면의 본질마저도 처음 모습 그대로 유지해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처음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지고 원래의 까맣던 본질로 돌아가곤 한다. 타인을 이렇게 평가하는 나조차도 ‘좋은 사람’의 가면을 오래 쓰지 못한다. ‘좋은 사람’이 본 모습이라면 굳이 가면을 쓰지 않아도 오래도록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데, 행정실장님이 그런 소수의 사람 중 한 분으로 여겨진다. 약 6개월의 시간 동안 실장님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비가 오는 오늘도 실장님은 안전모와 혼연일체가 되어 건물을 누비고 계신다. 일에 대한 사명감인지, 학교 구성원의 일부라는 주인의식 때문인지, 원래 타고나기를 바지런히 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하루도 쉬지 않고 모든 일에 열정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자기 일도 남에게 미루고 모르는 체하는 일이 다반사인 요즘 때에, 직급과 나이를 넘어 모든 일에 열정인 실장님은 누구에게나 본받을 대상이 아닐까?

오늘은 행정실장님께 잘 비벼진 짜장면을 한 그릇 대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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