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 못 걸어도 반지락은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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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 못 걸어도 반지락은 판다
  • 박남수 기자
  • 승인 2023.09.18 1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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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완도=박남수 기자] 늙어 못 걸어도 손에 호미 쥐고 반지락 판다. 양지뜸 사시는 숙모님을 아들이 업어다 데려다 놨다. 백발이 멋지다 했더니 늙어 추하단다. 늙어도 엄마가 직접 갯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어촌마을 자치조직은 어촌계다. 어른들(남성들)의 조직인 어촌계도 바다와 갯짝(개뻘)으로 나뉜다. 전자는 남성들의 것이고 후자는 여성들의 영역이다. 개뻘엔 바지락과 굴(석화)이 주산물인데 봉명리 반지락이 고금도에서 제일인지라 규칙이 제법 엄하다.

한 집에 반드시 한 사람만 작업해야 한다. 어기면 벌금 5만원에 추가 벌칙이 따른다. 개튼 날 외에 몰래 개뻘에 들어가면 더 엄한 벌이 주어진다. 이 모두 오랜 관행이다. 때론 불편하겠지만, 이 오랜 규약이 지켜졌기 때문에 바다가 건강할 것이다. 지속가능성은 이런 걸 말한다. 최근 동네에 들어서는 전복, 광어 양식장에서 배출되는 오폐수가 유일한 걱정거리지만.

엄마 따라 나섰지만 내 의욕껏 호미 들고 덤빌 수는 없어 홍구네 엄마가 파헤친 자리를 뒤따르며 미쳐 줍지 못한 바지락을 줍는데 그것조차 금지된 전례가 있다고 했다. 심지어 작업한 갯것을 개뻘에서 길까지 들어다 주는 일도 금했던 시절이 있다 하니 그 일도 그만 뒀다.

이런 저런 규칙들이 야박하고 불편해 보이지만 그것 덕분에 아직껏 바다가 청청함을 유지하는지도 모르겠다. 남성들로 구성된 어촌계보다 개뻘을 관리하는 부녀회가 더 부자인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서구 선진국 민주주의만 대단한 것은 아니다. 작은 어촌마을 오랜 자치규약에 서구보다 위대한 민주주의적 전통이 있다. 공동체 유지와 자원의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능력과 노력이 지방의회와 지방정부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어찌 지방 귀족이나 집행부 거수기로 전락한 기초(광역) 한량들에 비하겠는가?

백발 가득한 숙모님이 젊은 아들 대신 갯것 하러 나온 이유는, 오랜 시절 유지 관리해왔던 마을 공동체와 바다환경을 노인들에게 직접 확인 받는 존엄한 의례일지도 모르겠다. 반지락 채취량은 비록 적더라도 말이다. 반지락 국물에서 우러나는 진한 맛 같은 자치와 민주주의를 우리는 언제쯤 맛볼 수 있을까?

2013년 9월 17일 고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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