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외로움이 달콤한 고독이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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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외로움이 달콤한 고독이 될 때
  • 굿모닝완도
  • 승인 2022.09.29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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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유종필(전 서울시 관악구청장)

한물간 중년 배우 밥(빌 머레이 분)은 위스키 광고 촬영 차 도쿄에 온다. 신혼의 샬롯(스칼렛 요한슨 분)은 사진작가인 남편을 따라 도쿄에 머무르지만 일에 미친 남편은 아내를 홀로 내버려둔다. 낯선 환경과 뜻 모르는 언어의 홍수 속에서 외로움과 무료함, 시차로 인한 불면에 시달리는 '고독 남녀'는 같은 호텔에 투숙하면서 엘리베이터와 카페, 바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끝도 시작도 없는 시간의 흐름 속 광활한 우주에서 동일 시공간의 잦은 조우, 반복되는 우연은 필연으로 인식되는 법. 눈인사를 하고, 대화를 하고, 술을 마시고, 담배 한 개비를 함께 나눠 피우고, 팔짱을 끼고, 손을 어루만지고, 볼 키스가 포옹을 거쳐 입 포개기로 발전한다. 불륜까지 이르게 될까. (성경에는 마음만 품어도 간음이라고 하지만...) 내 안의 속물근성은 궁금증을 발동시킨다. 

​신혼의 샬롯은 묻는다. "결혼해 살수록 정이 드나요?" 결혼 25년 차의 밥은 독백 조로 읊조린다. "처음엔 죽고 못 살아. 아내와 웃음이 끊긴 적이 없지. 어디든 함께 했는데 이젠 애들이 우선이고 나는 필요 없어졌어." 위기의 남자인가, 위기의 부부인가.

​밥의 표정에서 원로 배우 윤일봉 선생이 떠올랐다. 1980년대 웃음기 없는 중후한 중년 신사로 나와 파릇파릇한 아가씨와 사랑인지 불륜이지를 나누는 최고 최적 단골 역이었다. 이 시절 홍보 카피가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 추억을 자극한다.

중년의 달콤한 고독

아, 고독이 달콤하다니! 일본에서는 고독력(孤獨力)이 인기 키워드로 떠오른지 몇 해 되었다. 나이 들수록 고독을 견디는 차원을 넘어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고독도 능력이다. 인생 후반 행복의 열쇠로 인식된다. 영화 감상도 고독과 친구 되기의 좋은 방편. 나는 시골에서 살다 지방도시로 고교 진학을 하니 방과 후에 참 외로웠다. 번화한 거리가 나와 무관함을 인식했을 때 공허함이 엄습한 것. 영화 두 편을 상영하는 극장 2층 구석에 홀로 앉아 퀴퀴한 냄새를 참으며 어떤 때는 한 바퀴 더 돌기도 했다.

​낯선 곳에서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아니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격. 외로운 아기 사슴의 눈망울을 닮은 스칼렛의 연기가 빛난다. 7일 만의 예정된 작별. 눈물이 흐르지 않고 벌게지기만 하는 눈자위가 더욱 애절한 느낌. 별 말 없이 껴안아 주는 빌 머레이의 멍한 표정이 윤일봉을 닮았다. 태평양 건너의 아내와 가끔 실무적 대화만 나누는 밥의 톡톡 끊어지는 어투는 중년의 감흥 없는 부부관계를 잘 표현한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각본까지 쓴 이 영화는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비롯, 숱한 상을 차지했다. 스칼렛 요한슨의 출세작. 북유럽 풍의 냉(冷)한 풋풋함이 일품. 감독은 <대부 1~4>의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외동딸. <대부 3>에서 돈 마이클 코르네오(알 파치노 분)의 딸로 출연했는데, 연기에 소질 없음을 확인하고 감독으로 전향했다고. 대~박!
(출처: 유종필의 넷플릭스 영화 산책)

 

 

 

유종필

전 관악구청장
전 국회도서관장
전 김대중 대통령 비서관
서울대 철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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