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로운 소녀와 중년의 화가, 그 절제된 관능미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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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소녀와 중년의 화가, 그 절제된 관능미의 매력
  • 굿모닝완도
  • 승인 2022.10.28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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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영화 보기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유종필(전 서울시 관악구청장)
유종필(전 서울시 관악구청장)
유종필(전 서울시 관악구청장)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걸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탄생 과정을 다룬 소설이 있다. 그 허구의 소설을 토대로 이 영화를 만든 것. 이런 메커니즘은 처음 보는 것이기에 흥미롭다. 미술 애호가인 나는 몇 해 전 헌책방에서 우연히 소설을 발견하고 단숨에 읽었다. 실제 그림의 탄생 과정은 전혀 알려진 바 없다. 특히 '북유럽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신비의 모델에 대해서는 정보가 전무하다. 소설 속 스토리는 백 프로 작가의 상상력이다. 소설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영화는 꽤 볼 만하다. 뛰어난 영상미와 중세 시대상,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 화가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주인공 역의 스칼렛 요한슨은 순백의 북유럽 미인(실제는 미국 배우)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화를 볼 때 그림을 옆에 두고 보기를 권한다.


그림에 대한 소설적 상상력

17세기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16세 소녀 그리트는 아버지가 다치는 바람에 생계를 위해 화가의 집에 하녀로 들어간다. 화가는 오늘날 천재로 불리지만 당시는 대부분의 화가들처럼 지방의 돈 많은 후원자에 기대 살아가는 정도. 그리트는 닥치는 대로 궂은일을 하면서 화실 청소까지 담당한다. 까칠한 성격의 화가는 말이 별로 없다. 그리트는 단순 청소에서 물감 사 오기, 더 나아가 물감 배합도 하고, 급기야는 그림과 관련한 대화까지 나누는 등 화가로부터 인정받게 된다. 어느새 외로운 화가와 뮤즈의 관계로 발전한다. 영화는 둘 사이 별 대사는 없지만 자연스레 그런 분위기로 이끌어간다.


화가와 하녀, 진정한 뮤즈일까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중반을 훨씬 넘어서야 본론으로 들어간다. 화가는 그리트에게 영감을 받았는지 그녀를 모델로 한 그림을 구상한다. 소녀를 단장시켜 창가에 세워놓고 포즈를 주문하면서 작업을 하려는데, 뭔가 부족한 느낌을 받는다. 소녀의 귓불이 허전한 것.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이 그림의 하이라이트이자 생명력인 하얀 진주 귀걸이. "아하, 하얀 진주 귀걸이가 있으면 좋겠구나!" 이런 대사는 없지만 이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문제는 아내의 진주 귀걸이를 가져다 써야 하는 것. 아내는 예술보다는 속물에 가깝고, 남편과 하녀 사이를 의심하고 질투하는 여자다. 어떻게든 사위 출세시켜보려는 장모가 딸의 진주 귀걸이를 몰래 가져다준다. 그러나 그리트는 아직 귓불도 뚫은 적 없는 앳된 소녀인데다 마님의 귀걸이라서 이를 거부하는데, 화가는 그녀의 귀에 진주 귀걸이를 착용시키는 데 성공하고 그림을 완성한다. 그림을 본 아내는 노발대발. 화가와 장모는 그리트를 감싸주지 않고, 그리트는 진주 귀걸이 도둑으로 몰려 쫓겨난다.


하얀 귀걸이가 그림에 생명력 부여

앞서 언급한 것처럼 화가만 실존 인물일 뿐 스토리는 완전한 허구이다. 그림 속 소녀가 워낙 신비감을 자아내다 보니 모델에 대한 구구한 억측과 상상, 추리가 몇백 년간 계속되었기에 소설도 나왔으리라. 모델이 실존 인물인지조차 불분명하다. 가부 양설이 있다. 실존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대로인지, 어느 정도나 가공했는지 모른다. 그림만 놓고 보면  모델이 귀족인지 하녀인지 중간계급인지, 혹은 딸인지 알 수 없다.

이 그림의 생명력은 왼쪽으로부터 들어오는 빛을 받아 상의 옷깃의 흰색을 반사하는 진주 귀걸이에 있다. 이것과 눈빛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은은한 신비감을 완성한다. 만일 진주 귀걸이가 없다면 눈빛만 강조되어 불안정한 구도가 되었을 것이다.

이 그림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끄는 이유는 '인 듯 아닌 듯'에 있다. 미소인 듯 아닌 듯. 입술을 벌린 듯 아닌 듯. 여인인 듯 아닌 듯 (16세면 여중 2~3학년). 귀족인 듯 아닌 듯. 슬픈 듯 아닌 듯. 청순미랄까 백치미랄까. 이 모든 것들이 이 그림의 생명인 '불가사의한 신비감'을 완성한다.

만일 소녀가 활짝 웃고 있거나 무뚝뚝하다면 어떤 느낌일까? 입을 꽉 다물거나 쩍 벌리고 있다면? 코가 오뚝하거나 낮다면? 귀걸이가 없거나 크거나 빨간색이라면? 소녀의 표정이 당당하거나 비굴하다면? 뒤집어 말하면 이 그림은 그 자체로 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네덜란드에 간다면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우스 갤러리에 가서 이 작은 그림을 한 시간 넘게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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