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2일 일어난 '고금도 독립만세시위'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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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 일어난 '고금도 독립만세시위'를 아십니까?
  • 박남수 기자
  • 승인 2024.01.20 22: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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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수(굿모닝완도 발행인)
2016년 11월 고금도 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도남리입구 삼거리에 조성된 테마공원에 고금항일운동충혼탑이 세워졌지만, 돌에 한 자 한 자 세겨진 선열의 뜻을 누가 알까?
2016년 11월 고금도 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도남리입구 삼거리에 조성된 테마공원에 고금항일운동충혼탑이 세워졌지만, 돌에 한 자 한 자 세겨진 선열의 뜻을 누가 알까?

 

소안도를 중심으로 전개된 항일투쟁은 널리 알려졌지만 고금도의 항일운동에 관해 아는 이는 드물다.

기록에 따르면(‘고금면연혁’ 1927년), 고금도의 당시 인구는 8,392명이었다(1,453호). 도남리가 197호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가교리가 179호, 상정리는 106호 등이었다.

근대적인 학교로 1907년 농상리(당시 대평리)에 환성학교가, 다음해 회룡리에 도암의숙이 세워졌다. 이들 학교는 1910년 일제에 의해 폐교되고, 1911년 농상리에 사립보통학교가 세워졌는데, 이는 1918년 덕암리로 이전해, 이듬해 4년제 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이후 1923년 6년제 공립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지금의 고금초등학교이다.

1927년 배달청년회사건과 이듬해 송내호 선생의 서거 이후 소안도 항일운동은 중심을 잃었다. 이후 고금도, 군외면, 조약도 등지에서 항일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920년 1월 고금도 독립만세시위, 1929년 용지포간척지투쟁, 1930년 전남운동협의회 활동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완도군은 지난 2016년 고금도 도남리 입구에 공원을 조성하고 거기에 고금항일운동충혼탑을 건립했다. 몇 차례 기념식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 그 탑이 세워진 까닭을 아는 이 몇이나 될까?

먼저, 오는 1월 22일이면 104주년을 맞는 고금도 독립만세운동의 주역들과 그들이 온몸으로 써나갔던 소설 같은 만세 이야기를 돌아본다.

1920년 1월 10일 밤, 고금보통학교 정학균(17세, 도남리)이 이현열(20세, 청용리)을 만나 만세운동을 제안하여 서로 의기투합했다. 이들은 고종 서거 1주기인 1월 2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정학균과 이현열은 지인들과 접촉해 마을별로 책임자를 선정했다. 이현열은 태극기 제작에 착수했다. 집안 조카 이기홍과 이동운을 시켜 덕동과 도남리, 농상리에 있는 상점들에서 창호지를 10매씩 그리고 붉은색과 푸른색 물감을 여러 번에 걸쳐 사오게 했다. 거사 전날인 21일, 이현열은 자기 집 사랑채에서 같은 집안 홍철수, 김천영, 그리고 청용리 이수열, 이기홍, 이동운, 이정재 등의 도움을 받아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들은 들기름을 먹인 두꺼운 장판지에 태극의 하부모양과 팔괘를 그려 오려냈다. 청색과 홍색, 검정색의 물감을 접시에 풀어 구둣솔에 묻혀 먼저 청색을 칠하고 다시 뒤집어서 홍색을 칠한 뒤 사방 팔괘에 검정색을 칠하는 순서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현열과 홍철수가 이 작업을 마치면 이수열과 김천영은 붓으로 선을 깨끗이 교정하는 마무리 작업을 하였으며, 이기홍과 이정재가 이를 멍석에 널어 말렸다. 마른 태극기는 다시 이정열, 이공진, 이기동 등이 대나무 깃대에 풀로 붙였다.

이 작업은 오후 늦게 이루어졌으며, 완성된 태극기 약 30매는 다시 한지에 말아 왕골속으로 묶어 덕암리 고금보통학교 기숙사와 다른 비밀장소로 운반했다. 이현열은 격문 7통을 만들어 21일 밤 고금보통학교 기숙사에 전달했다.

22일 거사일 아침. 경찰은 비상경계를 폈다. 경찰주재소 순사부장과 순사 2명 그리고 소방대원 등이 보통학교 앞길에서 행인들을 검문했다.

이현열은 각 마을 대표들에게 마을별로 10여 명씩 동원하게 했고 21일 밤 마을 대표에게 태극기를 전달했으며, 22일 아침 현장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22일 오전 11시경. 덕암리 고금보통학교 뒤편 덕암산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정학균의 지시를 받은 학생들 일부가 덕암산 정상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경찰은 메가폰을 들고 내려오라고 외쳤지만 끝내 내려오지 않자 산 위로 쫓아 올라갔다.

그러자 산 위에서 만세를 부르던 이들은 자취를 감추고 만세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학교 앞에 갑자기 300여 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군중이 모이자 정학균과 이현열은 차례로 나와서 연설했으며, 그들의 선창에 따라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했다.

놀란 경찰이 산 아래로 달려왔고 그 사이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충분히 외친 뒤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현장에는 태극기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농상리 배명순이 태극기를 모두 수거해 멀리 떨어진 보리밭으로 가서 불태웠기 때문이다.

경찰은 고금면 주재소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만세운동에 참가한 이들의 검거에 나섰다. 당시 연행된 이들은 모두 80여 명이었다. 주모자였던 정학균, 이현열, 홍철수, 김천영, 이수열, 배명순 등도 모두 검거되었다.

1920년 2월 10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정학균은 징역 4개월, 이현열은 징역 3개월 10일, 홍철수, 이수열, 김천영, 배명순 등은 태형 90대를 각각 선고받았으며, 같은 해 5월 3일 이현열은 징역 2개월 18일, 정학균은 2개월 17일로 감형되어 출옥했다.

*고금도 독립만세운동 이야기는 사단법인 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가 지난 2000년 편찬한 <완도군항일운동사> 중 “일제하 고금도의 항일민족운동”(박찬승 논문)을 참조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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