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고자 완도군수 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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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고자 완도군수 출마"
  • 박남수 기자
  • 승인 2021.11.08 09:58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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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군수 입후보 예정자 인터뷰: 김신의 완도 사랑 ①

오는 2022년 6월 예정된 제8회 지방선거에서 완도군수로 입후보할 예정인 분들로부터 완도군의 여러 문제들과 대안을 들어본다. 김신 전 완도군의회 의원을 만났다(인터뷰․정리=박남수 발행인).


자신은 누구인가?

김신 전 완도군의원
김신 전 완도군의원

나는 완도읍 죽청리 출신으로 완도중학교 졸업 후 광주에서 고등학교 재학 중 그 참혹한 5.18 광주 민주항쟁의 현장의 전모를 목도하며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이 의식화되는 청소년기를 보내고 울산시에 있는 현대중공업을 거쳐 창원시에 있는 공기업이던 한국중공업에서 5년 동안 근무하면서 80년대의 치열했던 노동운동의 선봉에 있었고, 당시 김대중 대통령 선거활동 마산시 캠프에서 선거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군사독재시대의 우리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온몸으로 체험하였다.

타향에서 이렇게 치열한 삶을 살다보니 내가 사랑하는 고향, 완도에서 나의 삶과 지역발전을 함께 이루고 싶은 마음을 품고 20대 후반에 내려와서, 부모님 모시고 결혼도 하고 행복한 가정인으로, 성실한 사회인으로 살며 지역의 시민사회운동을 하고 이른바 386세대의 시대정신을 고향에 실천하고자 노력했으며, 정의감 앞세우며 지역청년운동을 해오다 38세에 우리 지역에서 처음으로 전남청년회의소(JC) 지구회장선거에 당선되어 전남청년 지도자로서 완도의 기상을 드높이는 활동도 하게 되었다.

40세에 첫 군의원에 당선된 후 재선되어 활동하며 지방정치인의 표상을 만들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해오다 한 번의 도의원 선거와 두 번의 완도군수 선거에 연달아 낙선의 아픔을 겪고 10년이 넘는 야인생활을 하고 있지만 우리 지역의 혁신적 발전을 위한 사명감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각오와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지금껏 끊임없이 지역을 이끌 준비를 해오고 있다.


자신의 가족 소개와 자랑을 해달라

아들 원일이가 해양경찰에 입대하여 훈련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아들 원일이가 해양경찰에 입대하여 훈련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존경하는 스승을 만나고 진정한 벗을 사귀는 것이 인생의 큰 기쁨이라 했지만 더 중요한 건 좋은 부모님을 만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부모의 위치에 서보니 좋은 부모 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좋은 부모 만난 걸 최고의 타고난 행운이라 생각한다. 내 부모님은 40년 이상을 거의 매일 새벽4시에 야채 등을 머리에 이고 십리길인 읍내까지 장사를 다니며 4남매를 모두 광주로 서울로 유학 보내며 평생 뒷바라지 하셨다.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온전한 사랑은 그렇게 이어져 오고 있다.

내 아내와의 만남 또한 제겐 과분한 행복이다. 넉넉한 여유로움과 때론 냉정한 심판자같이 늘 나의 삶을 일깨워주는 내 아내는 나와 7년의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에서 안정된 직장에 다니던 내 아내는 낙향을 선택한 나를 찾아 무작정 완도에 내려왔을 땐 무슨 배짱으로 이런 선택을 하였을까 하는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더구나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편안한 친화력이 있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많은 힘이 돼주는 사람이다.

이런 아내의 노력 덕분에 자식들 삼남매 모두는 고등학교까지는 완도에서 다니며 부모와 함께 살자는 제안을 흔쾌히 따라주며 인성 좋은 아이들로 모두 성장해 성인이 된 지금도 제게 큰 응원군이 되고 있음은 내가 20여년의 고달픈 정치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다.


왜 군수를 하려는가?

완도를 지키며 지역청년운동과 시민사회운동을 하고 군의원 8년의 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늘 지속가능한 고향 발전을 위해 고민하였고 군민들의 하나같은 바램이 무엇인지 생각했으며 내 자식들과 함께할 완도의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갖게 하는 방법을 찾아 열심히 뛰었다.

그러나 재선 군의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소신과 열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실천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 건전한 비판과 견제만으로는 완도의 미래를 제대로 견인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관행과 기득권에 맞서 싸우며 큰 불이익과 정치적 음해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결코 굴하지 않으며, 떳떳하고 당당하게 군수에 출마하는 것은 내 자식들과 완도의 미래가 될 젊은이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고자 함이다. 시대가 달라졌다. 사회도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다. 소멸위기에 있는 내 고향 완도는 변화에 능동적이며, 변화의 중심에 완도다움의 가치와 원칙을 지키고, 우리 군민 모두에게 완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일깨워 자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지역이 되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제2의 장보고 시대를 열고자하는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첫 선거이후 20여 년의 세월을 완도호를 이끌 선장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준비하고 또 준비했다.


군수 출마에 대해 부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의 꼼꼼하고 원칙주의적인 성격 탓에 친화력보다 치열함과 열정이 앞선 단점을 본인의 친화력으로 조언하고 보완해주는 동지 같은 인생의 동반자인 내 아내는 6번의 선거를 치루고 3번의 연이은 낙선의 충격을 겪으면서도 남편이 세운 대의의 대해 단 한 번도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은 아내의 성품 탓도 있겠지만 남편에 대한 무한 신뢰가 바탕이 되었으리라 믿고 있다.

내년 6월 1일 있을 군수선거에 3번째 도전을 본격화 하고 있는 요즘 응원의 기운이 더욱 넘치는 것을 보아 내 아내는 아직 사랑과 열정 그리고 남편에 대한 신뢰가 더욱 단단해지고 있음을 확신하며 출전준비 이상무 보고를 올리고자 한다.


군의원 생활 중 가장 보람 있었던 경험은 무엇이었나?

군의원의 의무는 군정을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감시와 견제를 하는 일이라 여기며 나는 군의원 8년 활동 중 주민혈세를 낭비하는 것을 막아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특히, 50억 규모의 후코이단가공 보조사업의 문제를 다루는 의회 행정사무조사 특별위원장을 맡아 불법 부당한 보조사업의 실태를 낱낱이 파헤쳐 사업자가 법적 심판을 받게 하였으며, 대도시에 추진했던 수십억 규모의 선어회 가공 및 전복직판장보조사업도 특혜성 부실사업으로 밝혀내 보조금을 회수하는 등 잘못된 보조사업 관행을 바로잡는 본보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개혁적 의정활동에 대해 토호기득권세력의 저항과 보복이 극에 달해 끊임없이 나를 음해하고 모함하여 직권남용으로 전남경찰청에 조사받게 하고 개인사업장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투서하여 검찰특수부수사를 받게하는 등 온갖 핍박이 이어졌지만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소신과 원칙을 지켜 군민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점은 보람있는 투쟁적 의정활동의 순간들이었다.

또한, 의정활동 실적으로 공무원 특채 및 인사행정의 문제점, 투명하지 못한 각종건설사업 발주와 부실시공문제점, 잘못된 정책의 문제점, 불법 부당한 보조사업집행의 문제점, 선거용 선심성 예산낭비 등을 바로잡기 위한 저의 치열한 의정활동의 노력들을 금액적으로 환산해본다면 수백억원의 예산을 절감하는 활동을 하였다고 감히 자부해 본다.


군의원 생활 중 가장 아쉬웠던 때는 언제였나?

신지면 명사십리 해수욕장에 인접해 있는 군유지 4천여 평에 고려대 수련원을 유치한다는 미명 아래 금싸라기 같은 땅을 헐값(평당 6만여 원)에 사학재단에 넘겨주고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실정인 걸로 알고 있다. 나는 군의원 시절 이 문제를 해결하고 땅을 되찾고자 매년 줄기차게 군집행부에 촉구하고 압박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의원직에서 물러난 것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또한 개인적으로 군의원 활동과정 중 문제점을 찾기위해 동분서주했던 시간이 대안을 찾기 위한 연구의 시간보다 많았던 것이 아닌가 되돌아보게 된다. 40대 젊은 혈기에 정의감이 앞선 탓 일수도 있겠지만 공명심 또한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 제8대 군의회에 대한 평가를 해달라

군의원을 역임했던 나로서는 현직의원들에 대해 평가를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듯하다. 단지 논란이 되어온 고금 돈사 허가취소와 관련해 10억 이상의 혈세낭비 부분에 대한 책임문제와 구상권 청구문제는 의회차원에서 문제 제기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히, 해양치유공단 설립 문제는 의회가 동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내가 의원 활동하던 때 완도군개발공사 설립에 대한 의회 동의안을 2년 동안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나의 강력한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다 내가 의원을 그만둔 바로 다음 의회 때 승인되어 개발공사가 설립되어 별다른 실적없이 제가 주장했던 대로 수년간 군비만 낭비하다 결국 감사원의 폐쇄 통보를 받고서야 슬그머니 개발 공사를 없앤 행정 경험을 갖고 있음에도 이보다 어림잡아 열배는 더 큰 규모의 관리공단을 설립한다면 막대한 군 재정의 어려움만 가중시킬 것이라 판단된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청년회의소(JC) 전라남도 대표를 맡던 시절 무엇보다 소중한 전국적 인맥을 형성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최고의 순간들이었다.
청년회의소(JC) 전라남도 대표를 맡던 시절 무엇보다 소중한 전국적 인맥을 형성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최고의 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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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수 2021-11-19 19:05:33
부디 완도를 위해 일해주십시오

완도인 2021-11-09 14:26:35
정말로 응원합니다.

이창돌 2021-11-08 13:18:41
응원 합니다

박민수 2021-11-08 11:38:53
진정성이 느껴지네요.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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